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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십 년 전, 스위스 오버워치 본부가 누군가에 의해 폭파되었다. 콘크리트 잔해에 파묻히고, 흙먼지들이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래, 다 옛날 일이지.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홀가분하다고, 머리에 서리가 내려 그때의 명예를 회상하던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본부 폭파 전이 더 끔찍했다. 블랙워치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 비난의 화살은 곧 총사령관인 그에게 돌아왔다. 그렇게 믿었던, 사랑했던 그의 애인 가브리엘은 자신이 얼어붙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점점 망가져 가는 그를 등한시했다. 아팠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그저 세상을 지키고 싶었다, 그의 애인과 함께.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이 그토록 지켜내고 싶어 했던 세상은 그를 배반했고, 그의 모든 것이던 가브리엘마저도 그의 곁을 떠났다.

 

 잭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여러 실험에 의하여 강화 군인의 몸을 가진 그마저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점점 회복 속도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탈론의 한 암살자의 샷건 덕분에 몸 이곳저곳에 총알이 박혔다. 온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아, 죽을때가 됐나 보군. 잭은 슬슬 죽음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었다.이게 그의 마지막 기억들중 일부이다.

 그가 깨어났을 땐 웬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 앙겔라! 그래, 웬 앙겔라가 할로윈에나 할 보랏빛 마녀 복장을 입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껌벅이곤 묘하게 끌리는 조명의 색과 은은한 라벤더 향을 깊게 들이마시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좀 드시나요, 모리슨?” 이것이 마녀 복장을 입은 앙겔라의 첫 말이었다. 잭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글러?” 잭이 그녀에게 묻는 첫 질문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당신이 알고 있는 앙기와는 조금 다른, 앙겔라 치글러입니다.” 잭은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어나니 이게 무슨 일인가, 가벼워진 몸에 얕게 생긴 생채기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상처며, 허리 통증에 무릎이 욱신거리는 느낌까지. 모두 사라졌다. 앙겔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며 옅게 웃었다. “다 죽어가는 당신을 데려와서 평생을 살 수 있는... 그런 몸으로 만들었어요. 아, 걱정하지 마요. 제가 다시 영면에 들게 할 방법은 고려해두고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니까요.”

 잭은 잠시동안 멍한 표정으로 앙겔라를 응시했다. 평생 살 수 있는 몸이라니, 묘한 기분에 몸이 가볍게 떨렸다. 앙겔라는 잭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자, 짧고 굵게 설명해드릴게요. 당신은 평생 살 수 있고, 목숨은 나한테 달려있어요. 만족스러운 답이었나요?” 살풋 웃는 그녀의 모습과 블랙워치에 있던 오드아이를 가진 매드 사이언티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잭은 일어나 전신거울에 몸을 비췄다. 안 그래도 흰 피부가 이제는 창백했고, 눈가 주변이 거뭇거뭇했다. 잭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래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가브리엘이 죽었다, 이게 전부다. 그 망할 테러를 일으키곤 자신도 죽어버렸다, 바보 같은 놈. 순간적으로 잭은 그를 떠올렸다. 제기랄. 속으로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머릿속에는 가브리엘이, 눈앞에는 창백한 피부와 거뭇거뭇한 눈가를 가지고있는 낯선 모습에 그는 저 큰 거울을 부셔버리고 싶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앙겔라는 그의 모습이 우스웠다. 거울 앞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려나-.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한때는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던 그가 자신의 손아귀에 놀아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놀아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잭은 고개를 살짝 틀어 앙겔라를 힐끗 쳐다봤다. 앙겔라는 그를 향하여 방긋 웃었다. “당분간은 나랑 같이 생활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은 제 걸작이에요. 앞으로의 몸 상태의 변화가 궁금하기도 하고, 당신의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여 다른 불멸자들을 더 만들어낼 수도 있겠죠.” 그는 슬슬 방글방글 웃고 있는 저 금발의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앙겔라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쯤을 양기와의 생활을 끝내곤, 그녀가 준비한 꽤 크고 잘 되어있는 집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생각보단 괜찮았다. 가끔씩 손이나 허벅지가 잘게 떨리는 것 외에는 거의 부작용이 없었다. 굳이 끼니를 때우기 위한 뭐 먹지? 라는 사소한 고민부터 다치거나 더욱 병들게 되어 쓰러질 걱정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꽤 행복했다. 피곤한 날에는 밥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고 온종일 잠에 취할 수 있었다. 그가 사령관인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유토피아인 셈이다. 딱 하나가 없어서 많이 허전했지만.

 어느 날, 잭은 작은 편지가 그의 집 앞의 작은 우편함에 담겨있는걸 보았다. 하, 구시대적이군. 약간의 불평이 담긴 손으로 편지지를 열어 편지를 보았다. 이걸 보는 즉시. 나한테 찾아와요, 잭. -A.Z- 하, 그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앙겔라군...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 두어 병을 사서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는데. 그는 그녀에게 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날, 그때 자신이 있던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좀 달랐다. 그 사람은 온몸을 붕대로 싸맨 체로 수갑으로 팔다리가 묶여있었다. 잭은 그를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군지 알 필요도 없었고. 침상 위의 그 사람은 잘게 몸을 떨다가 경련을 일으키길 반복했다. 앙겔라는 웃으며 잭에게 다가갔다. “쓸쓸해보여서, 친구를 하나 데려왔어요. 아, 아직은 새로운 몸에 적응하는 중이니깐... 곧 멀쩡한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그녀는 침상 위의 핏덩이에게 다가가곤 무어라 속닥였다. 잭은 듣지 못했다. 침상 위 그가 헐떡이는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잭은 불쾌한 약 냄새와 숨을 헐떡이다 기절한 듯한 그를 친구로 삼기는커녕, 같이 있는 것마저도 끔찍하다고 속으로 연신 되뇌었다. 앙겔라는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옅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친절한 사람이니까.” 잭은 작게 한탄했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잭은 주방 서랍장에서 인스턴트 스프 분말을 하나 꺼내어 물을 잔뜩 넣어 간 따위는 개나 줘버린 스프를 끓였다. 건조 플레이크가 맹물 같은 스프위를 둥둥 떠다녔다. 뜨거운 맹물 스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밀어넣은 그는 순간적으로 밀에 집어넣은 것을 다시 주륵, 뱉어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몇 마디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스프를 따라 버리고 접시와 숟가락을 대충 싱크대 안으로 던져두었을 때쯤, 밖에서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무시하려던 차에 앙겔라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결국 그는 문을 열었고, 앙겔라는 건장해 보이는 누군가의 등을 떠밀어 집안에 밀어 넣었다. 잭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앙겔라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또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난번, 그 새 친구예요. 잘 부탁해요.” 앙겔라는 잭에게 예쁘게 꾸며진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는 앙겔라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건네 받았다. 앙겔라는 어느 새에 사라졌고, 자신만한 남자가 저의 옆에서 잔뜩 굳은 채로 힐끔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것도, 저 음산한 마녀가 건넨 종잇조각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신도, 그냥 모든 것이 뭣 같았다. 속으로 잔뜩 욕설을 내뱉곤 덩치만 커 보이는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스캔하듯이 훑어내렸다. 흉측해 보이는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것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락서니하고는. 쯧. 혀를 찼다. 할로윈에 코스프레를 한 것 마냥 코스튬을 입은 것만 같았다. 앙겔라는 이런 취향인가 보군. 결국, 그는 픽 웃었다.

 잭은 앙겔라가 건네주고 간 편지를 열어보았다. 제목부터 그를 풉, 소리 나게 웃도록 만들었다. 친구 설명서. 옆에 그 남자, 그러니까 ‘친구’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슬쩍 다가와 잭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니까, 리퍼. 잭은 그가 쓸 방을 마련해주었다. 그는 대충 챙겨온 듯한 짐을 정리했다. 아예 눌러살 것 같았다. 잭은 그가 짐을 정리할 동안 앙겔라의 편지 속의 내용을 천천히, 한 글자씩 훑어내리며 읽어갔다. 끝까지 읽어내린 그는 편지지를 구기듯 접어서는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리퍼가 어깨를 세 번 두드리면 목을 대주어, 피를 공급해줘야 했다. 죽지 않는 자의 피가 뱀파이어에게도 통하는지에 관한 앙겔라의 실험이었다.

 리퍼는 집안 곳곳을 서성였다. 잭은 그런 그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두꺼운 책 하나를 책장에서 골라가서 다시금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잭은 그를 힐끔 흘겨보았다. 한참 후,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즈음에 리퍼가 두꺼운 책을 다시 있던 곳에 꽂아 넣고, 잭의 어깨를 세 번 쳤다. 잭은 뭐, 어쩌라는 눈빛으로 그의 가면을 파고들 듯이 노려보았다. 리퍼는 잭의 목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아, 잭이 티의 목 부분을 잡아당기자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리퍼는 그를 살짝 당겼다. 이내 그는 가면을 벗어냈고, 큰 손으로 잭의 눈가를 가렸다. 살이 이를 파고드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잭은 옅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입가에 묻어난 붉은 체액을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이 반년 정도 되어 갈 때쯤, 잭은 가면 속 얼굴이 궁금해져,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새하얗고 창백한 피부, 붉은 눈동자? 아님, 얼굴이 없을수도 있으려나. 자고 있는 그의 가면을 벗겨내려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의 손목이 단단히 아작날뻔했지만. 어느 날은 리퍼가 말을 걸어왔다, 잭에게. 마녀의 규칙을 어긴 것이다. 잭은 순간적으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라며 그를 말리듯 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대화다. 그들은 급속도로 더욱 친밀해졌고, 끈끈해졌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새 친구를 사귈 때처럼. 잭은 조심스레 리퍼에게 물었다, 그거, 벗을 생각은 없나 보지. 큰일 날 소릴.

 잭은 슬쩍 그와 손을 겹쳐 잡아보았다. 별 이유 있는 행동은 아니였다. 그저 알 수 없는 심정에 휩싸인 것이 전부였다. 리퍼도 겹쳐오는 잭의 손을 구태여 거부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리퍼는 그의 손을 한 번 쓸어내리다가 들어 올려 짧 게 입맞췄고, 곧이어 바투 다가와 그의 뺨에도 입 맞춰오는 시늉을 했다. 입맞춤보단, 짧은 비쥬 정도였다. 둘 다 이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잭은 흐흐, 소리내어 웃어 보이기도 했다. “이런 취미일 줄이야. 의외군.” 그날 이후부터, 그들 사이에선 간간히 짧은 손등 위의 입맞춤, 포옹 같은 한낱 우정의, 애정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이어나갔다. 시시한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좋아해.” 하일, 아침. 잭이 리퍼가 준비한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우적거리다가 베이컨을 밀어 넣을 차례에 뜬금없이 리퍼가 내뱉은 말이다. 잭은 아무 감정 없이 끄덕이다가 뻑뻑한 토스트를 삼키고 우유를 한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대답했다. “응, 나도.” 물론, 잭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나름 유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었던 마음에 장난스럽게 말한 것이었기에.

 새벽의 달이 은은히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즈음,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던 리퍼에게 다가와 눈 깜박일 틈조차 주지 않고 연신 떠들어대는 잭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잭이 계속해서 그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진부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하잘것없는 질문들을 받아내기에도 권태 해졌기 오래다. 결국 의자에 널브러져 잭의 소름돋도록 푸르렀을 색이 바래버린 눈동자를 응시했다. 서리 내린 머리칼부터, 창백한 피부. 인위적인 무언가가 만들어 냈을 붉은 눈동자부터. 턱을 따라서 시선이 자연스레 옮겨갔다. 눈썹을 꿈틀이곤 앞의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쳤다. 턱을 괴고, 자신을 훑어내려오던 시선에 눈높이 맞추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한 기류에 잭이 먼저 리퍼의 품에 파고들었다. 넓은 등을 한 번 쓸어내렸다. 토닥거려주고, 이제 어리광부릴 나이는 지난 것으로 보였는데, 아닌가 봐. 리퍼는 제 품에서 소록소록 호흡하는 잭의 모습에 낮게 웃었다. 귀여워라.

 리퍼는 문뜩 그의 흰 목덜미에 제 이를 박아넣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큰 옷이 조금 흘러내려 목덜미가 훤히 보이는 것은 그를 자극시키기 제격이었다. 결국 그는 얼굴에 쓰고 있던 것을 조금 들어내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려고 하는 삽시간에 잭이 가면을 손으로 떨쳐 내고 리퍼의 뒷목 콱 붙잡아 겹쳐 포갰다. 두 눈을 감고 입 맞춰 오는 잭을 구태여 거부하지 않았다. 사뿐히 굳게 닫아온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진득하게 맞춰오던 입술도 떼어냈다. 진작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을 거어이 주워 다시 얼굴에 끼워 마줄 생각은 곱게 접은 지 오래이다. 잭의 붉은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입술에 묻어난 타액들이 모두 마르게 되어질 즈음에나 리퍼가 침묵을 뚫어내고 입을 열었다. “생각한 얼굴이랑 비슷했나 봐.”

 “가브리엘.” 잭이 품에서 웅얼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무어라 계속해서 울먹이며 말하다가 그것이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변질되서야 그는 말하기를 그만두고 품에 얼굴을 부벼댔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지만, 개의치않았다. 가브리엘은 어째 답답한 심정에, 그를 더욱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이고, 다독였다. 새날이 다가와 새벽바람이 스쳐 갈 때까지. 동이 트고, 다시금 품속의 그가 금빛 미소를 띄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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