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verwatch
Halloween Terror
마우가가 죽었다. 어떤 이의 죽음은 연기보다 빨리 잊힌다. 한때 단신으로 전장을 장악하던 중화기병의 죽음 역시 그러했다. 고작 한 달, 산 사람에겐 길지만 죽은 사람에겐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이후 마우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우가가 아닌 중화기병으로 기억된다면, 한 사람이 아닌 아닌 군인 하나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군인 하나로 기억된다면 처음부터 유령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중화기병이 아닌 마우가의 죽음을 애도라는 이는 바티스트뿐이었다. 임무에 가던 날 마우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충분히 쉬어 두는 게 좋지 않겠냐는 바티스트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까지 잡담을 나누다 잠들었다. 집을 나서기 직전 가볍게 키스했다.
"다녀올게. 큰 임무는 아니라서 나흘 정도면 끝날 거야."
그러고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조직을 배신한 의무병에게 연인이 죽었다고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신기의 신호가 이어지지 않는 것만이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키기는커녕 신원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묘지에조차 갈 수 없었다. 이조차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사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시신을 보면, 묘비에 적힌 글을 읽으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바티스트는 마우가가 그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연락이 끊겼을 뿐이라고, 곧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달, 위태롭게도 찬란했던 여름을 떠나보낼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 청명한 밤하늘의 푸른빛은 여느 때와 같이 고요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해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음 외에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없다. 서류 더미가 유리를 덮은 책상에 부딪치며 기계음을 끊는다. 일정한 기계음이 거슬려 살아 있다는 증거를 닫는다. 바티스트는 늘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통 신기를 꺼내 든다. 연락처는 한 군데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젠 아무런 쓸모가 없다. 통신기가 다시 책상에 부딪치는 소리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마우가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누군가를 저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건 처음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죽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물론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해도 달리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일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은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제어실로 잠입해 보안 장치를 제거하라는 간단한 임무. 직원들의 눈을 속이는 것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레버를 조작하는 것도 터무니없이 쉬웠다. 무전기로 수고했다는 말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모든 게 함정이었다.
마우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실책을 따지자면 바티스트를 믿고 주변을 전혀 경계하지 않은 탓이었고 그 이전에 제어실에 외부인이 출입한 것을 알아챈 탓이었다. 각 조직에서 손을 뻗는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사무실은 최고의 보안을 자랑했다. 최고의 보안에는 기폭 장치 역시 포함되었다. 설계자는 분명 EMP로 백업된 정보를 전부 삭제하고 침입이 일어난 건물 전체를 날려버려 침탈당할 바엔 파괴하려는 상황마저 가정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정보를 손에 넣었다 해도 마우가는 사망이나 실종, 폭파한다면 직원들은 모두 죽겠지만 마우가는 살아남을 것이다. 포르드페에서 그랬듯이.
바티스트는 탈론의 방법을 택했다. 트롤리 딜레마. 여럿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도, 한 사람을 위해 여럿을 희생시키는 것도 감히 결정할 수 없는 게 바티스트의 원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티스트는 레버를 당기는 것을 택했다. 사랑 때문에 신념을 버린다는 진부한 전개는 제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상황이 오자, 마우가 외에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한텐 너밖에 없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텅 빈 의무실을 정리하고, 색이 바랜 블라인드를 내리며 중얼거린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묻던 사람도, 같이 저녁을 먹자며 손을 잡아끌던 사람도 없다. 집까지 가는 시간도 한참이다. 번호판으로 뒤쫓는 사람이 있을까 없애 버린 차량이 불편하지 않은 건 늘 마우가와 같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들과 밤길을 걷는 것이 낯설다. 옆에서 떠들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낯설다. 그를 알기 전에는 일상이었고, 그를 잃은 후에는 상실감의 구현인 이 풍경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바티스트가 집에 들어온 건 막 시곗바늘의 일주가 끝나 시월의 마지막 날을 가리키는 시간이었다. 까마득히 어렸을 적 '죽은 자를 위한 날'이라 부르며 축제를 즐기던 기억이 있다. 축제라 해도 평소보다 좋은 빵을 먹고 거리가 조금 더 시끌벅적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그것마저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그저 한때의 추억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것이 착각이라도.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새꺄, 오랜만이다."
바티스트는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것이 꿈이라 생각했다. 서류에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 틀릴 리 없었다. 특히 인사 문제에 있어서는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오류가 생긴 거라면, 살아 있는 자를 죽었다 표기했을 뿐이라면, 시체 훼손이 심해 다른 이와 혼동한 거라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벅차오르는 마음은 담담하게 표현되었다. 표정의 변화 없이, 큰 동요 없이. 먼저 다가선 건 마우가였다. 마지막 하루를 눈물과 후회로 일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곱씹는 것도, 미련을 남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거니와 죽음을 맞이하기에 감히 부족한 점 역시 없었다 떠벌리고 다닐 만 했다. 그런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제가 여기 있을 이유는 단 하나였기에 마우가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좋을 대로 생각해."
웃음기를 띈 채 속삭이듯 말하는 것마저도 바티스트가 알고 있던 마우가의 모습과 같다. 새벽을 가르는 시곗바늘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멈춘 시간이 이제서야 흐르는 것처럼.
"지금까지 일하고 온 거야? 여전하네. 늦었으니 일단 쉬고, 내일 휴가 낼 생각 없어? 할로윈이잖아."
바티스트는 할로윈의 거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싫어하는 축에 가까웠다. 그저 축제라 생각한다면 좋았을 것을, 죽은 이들이 돌아온다는 유래는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채웠다. 저주라면 모를까 기다릴 이도, 찾아올 이도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온전히 잃었고, 온전히 기다렸으며, 온전히 돌아왔다. 진실과 혼동되어 더욱 아픈 상실이. 마우가와 가볍게 포옹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 돌아온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치 않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으리라 수없이 생각했기에.
"좋은 아침.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그냥 뒀어."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밤중에 셀 수 없이 깨어나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을 청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늦잠을 자는 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다. 바티스트는 급하게 휴가를 내겠다고 연락했다. 그렇잖아도 일손이 부족한데 이제서야 연락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 타박하는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난다. 교외의 작은 주택에까지 축제 분위기가 감돈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럴 여유도, 그렇게 할 마음도 없었다. 마우가는 대충 침구를 정리하고 욕실로 가려는 바티스트를 지켜보다 갑작스레 가볍게 키스한다. 바티스트의 놀란 표정을 즐긴다. 이내 다시 짤막하게, 그러나 짙게 혀를 섞는다.
"아침부터 이러기야?"
짐짓 퉁명스레 말했으나 거부하지는 않는 바티스트의 모습에 나지막이 웃으며 말한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헛소리 말고, 넌 준비 다 했어? 할로윈이라 해도 별 볼 건 없을 거야."
"뭐 어때. 씻고 나오면 바로 출발하자."
번화가는 생각보다 조촐했다.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아 아무도 화려한 축제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곳곳에 내걸린 호박 장식과 마녀나 흡혈귀, 유령으로 분장한 사람들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모든 게 여느 휴일과 같은 날.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평범했던 일상이다. 오늘은 잠시라도 평범할 수 없다. 평범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조금이라도 오래 눈을 마주치며, 셀 수 없이 사랑을 말한다. 내일이 오면 다시 평소처럼 되어 있을 거라고,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거라고 수없이 상상한다.
마지막으로 해변가에 도착한 시간에는 수평선 위로 붉은 햇살이 깔려 있었다. 내일이면 모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테고, 오늘의 여운은 기껏해야 미처 장식을 치우지 못한 며칠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하루는 꿈만 같았다는 상투적인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꿈만 같았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다. 축제는 끝난다. 바티스트는 그 여운이 오래, 잠시라도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란다.
"쟝, 하루뿐이지만 즐거웠어?"
"과분할 정도로."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맴돈다. 둘 다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다. 공허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 누군가를 이리도 갈구할 수 있었던가. 바티스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후회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럴 여유가 없고, 있다 해도 그럴 수 없었기에. 그를 만남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고, 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어둑해질 때까지 바다를 느낀다. 동시에, 상대방을 느낀다.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작별 인사는 웃으며 할 수 있으니까."
"다시 올 거지?"
바티스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한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일말의 희망이란 상투적인 말로 덮는다. 긴 침묵이 이어진다.
"언젠가는."
고작 네 음절에 담긴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까.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회를 약속한다. 가벼이 한 말이기에 무겁다.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이제 내가 없어도 오늘처럼만 지냈으면 좋겠어. 일도 좋지만 가끔 쉬면서 놀러도 다니고, 지칠 땐 그냥 피하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 했던 말, 꼭 이뤄. 그래야 동료들 볼 낯짝이 있잖아? 무엇보다 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마우가 넌 정말..."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작별 인사는 웃으며 할 수 있기를 바래서.
"날 보고 싶다고 서둘러 왔다간 혼내줄 거야."
마우가는 평소처럼 바티스트를 대한다. 농담을 하고, 킥킥거리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영원한 작별의 순간에 와서도 웃는다. 바티스트는 그런 마우가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 그 뒷편을 알아버린다면 정말로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에. 탈론의 협박, 세뇌, 죽을 고비도 여럿 넘겼고, 어느 한쪽이 끝을 언급할 때도, 모두 견뎌냈기에 마지막은 담담히 보내고 싶다. 바티스트는 마우가의 적안을 더 이상 또렷이 볼 수 없다. 제 속내 한 번 드러낸 적 없던 마우가 역시 수평선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잔인하게도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마우가는 더 이상 지체해 봐야 미련만 커지겠지, 생각하며 바티스트와 마주본다. 이제껏 늘 그랬듯이 가볍게 포옹한다. 바티스트가 자신을 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입을 뗀다.
"orevwa. 네가 여기로 온 날, 다시 만나자."
"Poroporoaki. 지옥이라도 좋으니 찾아갈게."
바티스트는 붉은 문양이 새겨진 통신기를 바닷속으로 던진다. 바람을 마주하고 천천히 걷는다. 뒤를 돌아볼 수 없다. 다시 달려가 키스하려 할 것 같아 도로에 다다라서야 해변을 본다. 낡은 가로등이 소금기를 머금어 흐릿한 빛을 토해내고 있다. 바람과 모래, 파도뿐인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실감한다. 마우가는 죽었다.